The Character and Founding Motive of the Daeguminuiso(大邱民議所), an Organization of the National Debt Repayment Movement
이 논문의 목적은 1907년 2월 21일에 설립된 국채보상운동단체인 대구민의소의 성격과 이를 설립한 이유를 밝히는데 있다. 얻어진 결론은 다음과 같다.첫째, 민의소의 성격은 「민의소규칙」과 「금연상채회규칙」의 비교를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대구민의소는 1907년 2월 21일에 대구금연상채회와 함께 새로 설립된 국채보상운동단체였다. 두 단체는 서로 닮은 점이 많은 ‘쌍둥이’ 단체였지만, 대구금연상채회가 상설 단체로서 대구의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음에 비해, 대구민의소는 ‘제1차 대구군민대회’를 통해 설립되고 해산된 단 하루동안 존속했던 단체였다. 곧 ‘제1차 대구군민대회’의 개최와 진행을 위하여 설립되었던 일회성의 실행단체였다.둘째, 대구민의소의 임원들은 「백남준보고서」의 부본으로 첨부된 「금연상채회임원록기」라는 고문서를 통해서 파악될 수 있다. 이 자료는 임원 대표가 의장인 데서 보듯이 제목과 달리 기록된 내용이 대구민의소의 임원이다. 이는 홍와고택 소장 고문서 자료인 인쇄본 「통문(通文)」의 말미에 수록된 ‘경상북도대구군금연상채회’ 임원과는 차이가 있다. 대표와 부대표의 직함이 의장과 부의장이고, 평의장이라는 직함이 존재하지 않으며, 평의원을 맡은 인물도 서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구민의소는 대구금연상채회와는 다른 별도의 임원 조직을 구성했던 것이다. 다만 의장·부의장·총무·재무를 비롯한 많은 주요 임원들이 대구금연상채회의 임원을 겸하고 있었다. 이런 임원의 겸임 현상은 대구민의소가 하루동안 존속한 일회성의 단체라는 성격에서 비롯되었다.셋째, 대구의 국채보상운동 추진인사들이 이런 특이한 성격의 대구민의소를 설립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일제 통감부 당국의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압력과 간섭이 점차 강화되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많은 인민들이 참여한 ‘제1차 대구군민대회’가 끝난 후에는 운동 추진인사들에 대한 강력한 책임 추궁이 예상되었다. 그래서 경찰의 탄압과 책임 추궁을 피하기 위한 하나의 방책으로 대구민의소를 설립하였으며, 대구민의소는 주어진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Publication Details
- Journal
- THE DAEGU HISTORICAL REVIEW
- Published
- 2025-08-31
- DOI
- https://doi.org/10.17751/dhr.160.83
- Primary Topic
- Geochemistry and Geologic Mapping
- Type
- article
- Field-Weighted Citation Imp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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