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bolition of the Jangyongyeong(壯勇營) and the Status of the Hunryeondogam(訓鍊都監) during King Sunjo(純祖)’s Reign
본 연구는 순조대 장용영의 혁파와 그에 따른 훈련도감의 위상 변화를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기존 연구는 장용영의 성립과 운영, 그리고 1802년 혁파 과정을 주로 정치사적 맥락에서 논의해 왔으며, 정조대 왕권 강화를 위한 친위 군영 설치와 순조대 수렴청정기 벽파 세력의 군사적 기반 약화를 중심으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장용영의 해체가 군사 제도의 변동에 미친 실질적 결과, 특히 조선 후기 수도 방위의 핵심 군영이었던 훈련도감의 구조와 위상에 미친 영향을 체계적으로 규명한 연구는 드물었다. 이에 본 논문은 『훈국등록』, 『만기요람』, 『실록』 및 『비변사등록』 등 1차 사료를 중심으로 장용영 혁파 이후 군액과 재원의 재분배 양상, 그리고 그로 인한 훈련도감의 기능 변화를 집중적으로 분석하였다.장용영 혁파는 단순한 군영 재편이 아니라 국가 재정 운용과 직결된 조치였다. 정조의 승하 이후 정순왕후와 벽파 세력은 장용영의 풍부한 재원을 활용하여 국장 비용 충당, 호조의 경상비 보전, 양서 민고(⺠庫) 재정 보충 등 대규모 지출을 단행하였다. 이로 인해 장용영 소속 병력과 재정이 본래 군영으로 환원되는 과정이 지연되었으며, 특히 훈련도감은 1802년 9월에 이르러서야 약 2,200명의 병력과 대규모 재정을 회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노비공 대체 재정의 호조 이관 등으로 인해 일부 재정은 회복되지 못하였고, 결국 1807년 김조순의 건의 이후에서야 본래의 재정을 돌려받아 군제의 정상화가 이루어졌다.이후 훈련도감은 다시 중앙 군영의 주축을 이루게 되었으며, 19세기 초 『만기요람』에 기록된 바와 같이 약 6,500명 규모의 군병을 편제하여 금위영과 어영청에 비해 압도적이고 실제 동원 가능한 전력을 유지하였다. 특히 무예별감과 삼수병을 중심으로 4,200여 명의 급료병이 상시 근무하면서 도성 방위와 궁궐 숙위를 전담하게 되었고, 장용영 폐지로 일시적으로 상실했던 국왕 호위 임무도 되찾아 무예별감 정원이 대폭 증액되는 변화를 보였다. 이로써 훈련도감은 단순한 도성 수비를 넘어 조선 후기 국왕 친위 기능까지 강화하면서 중앙 군영 체계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다.장용영 혁파는 정치적 권력 투쟁의 산물이자 국가 재정 위기의 대응책이었으며, 그 귀결은 훈련도감을 중심으로 한 수도 방위 체제의 재편이었다.
Authors
- D. Kim (ORCID: https://orcid.org/0009-0003-0427-4789)
Publication Details
- Journal
- Cheonggyeo History
- Published
- 2025-08-31
- DOI
- https://doi.org/10.33835/cghs.30.4
- Primary Topic
- Cultural and Historical Studies
- Type
- article
- Field-Weighted Citation Imp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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