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Josoon's Political use of Resignation petition (辭疏) during the Early King Sunjo (純祖) reign
본고의 목표는 사소(辭疏), 곧 사직상소(辭職上疏)를 통해 순조 초기 김조순의 행적을 분석하여 그의 정치가로써의 면모를 입체적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우선 김조순의 사소 4건을 ①수렴청정기 삼간택(三揀擇) 이전과 ②국혼(國婚) 이후, ③순조친정기 등 3시기로 나누어 분석했다. 김조순은 명문가의 자제로써 정조의 총애를 받은 신하였다. 1800년(정조 24) 왕실과의 가례(嘉禮)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정조는 천명(天命)·계술(繼述)·중망(衆望) 등의 명분을 동원하여 혼인 대상을 확정했지만, 정조의 갑작스러운 승하로 인해 가례가 뒤로 물려지게 된다. 1801년(순조 1)의 사소에서 김조순은 이조판서와 장용대장의 체직을 요청한다. 그 가운데 장용대장의 경우 본인이 현재 척신이 아니기 때문에 맡을 수 없다는 사유를 제시하는데, 이는 국혼의 지속을 요구한 것이었다. 1802년(순조 2)의 사소에서 김조순은 의례적으로 여러 겸대 관직의 체직을 요청한다. 주목할 점은 『훈국등록(訓局謄錄)』에만 수록된 국왕의 순문(詢問)이었다. 당시 국구가 겸대할 수 있는 관직의 범위는 서평부원군(한준겸)-광성부원군(김만기)-여양부원군(민유중) 등이 차례로 전례가 된 상태였다. 순조는 이를 바탕으로 김조순을 잉임시키는 근거를 마련했다. 1803년(순조 3)의 사소에서 김조순은 고상(高尙)한 위치를 선취(選取)하고 조정의 질시에서 벗어나기 위해 낙향을 기조로 한 사소를 올린다. 순조는 김조순을 장차 장병(將兵)의 차원에서 중용하기 위해서 겸직의 체차를 윤허한다. 1804년(순조 4)에는 정순왕후가 철렴(撤簾)하고 순조가 친정(親政)을 시작했다. 국혼을 방해했다는 사유로 권유(權裕)가 논척되었고, 이어서 경주 김씨를 필두로 한 벽파 세력들이 연좌되었다. 엄혹한 정황에서 정순왕후는 직접 언교를 내려 조카 김노충(金魯忠)을 비호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조순은 사건의 당사자였기 때문에 관례상 논핵받는 즉시 피혐하는 사소를 올려야했지만 사소를 최대한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리하자면 이상과 같은 김조순의 사소는 공통적으로 시의성(時宜性)을 충족하고 있었다. 이는 선왕 정조의 유지(遺旨)를 갖추면서 국왕 순조의 저의(底意)와 부합했으므로 순조 초기 약 30대 중반 나이의 김조순은 이미 노련한 정치가의 처세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Authors
- Tae-bin Han
Publication Details
- Journal
- Cheonggyeo History
- Published
- 2025-08-31
- DOI
- https://doi.org/10.33835/cghs.30.5
- Primary Topic
- Cultural and Historical Studies
- Type
- article
- Field-Weighted Citation Imp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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