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ain Grant to Tsushima during King Taejong’s Reign and the Establishment and Outcomes of the 1407 Diplomatic System
조선초 왜구 활동은 1410년~1418년(태종10~18) 기간 동안 일시적으로 퇴조한다. 그 직접적이면서 주된 배경 중 하나는 1406년(태종6) 이래 시행된 대마도에 대한 곡물 지급 시책이었다. 기존 통설에 의하면, 이 곡물 지급 시책을 비롯한 이른바 ‘회유책’이 시행되어 왜구가 감소하였지만, 이에 의하여 조선 조정의 부담이 가중되고 결국 ‘통제책’을 시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곡물 지급시책과 ‘통제책’이 모두 1406~1407년 무렵 거의 동시에 시행되었다는 점에서, 기존 통설 서술에서의 문제점이 확인된다.<br/> 본 연구는 곡물 지급 시책의 배경을 동아시아 정세 급변의 시각에서 고찰하였다. 1403년 명 영락제의 여진족 초유 정책에 따라 1405년까지 여진족 주요 세력들이 명의 위소 체제에 편입되었다. 그 결과 조선은 북쪽 변경 안보에 위협을 느꼈다. 1406년 2월 우디캐 김문내가 경원을 침구하자, 조선 조정은 그 다음달인 3월 대마도에 곡물 200석을 지급함으로써 곡물 지급 시책을 본격적으로 시행하였다. 그 대가로 대마도주 소 사다시게는 왜구 금압 정책을 시행하였다. 1407년(태종7) 무렵 조선 조정이 왜인에 대한 여러 규제 시책, 지원 시책, 방어시책 등을 발령한 것은, 이때부터 비로소 대마도주의 협력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본 연구에서는 이 시기 지원 시책, 규제 시책, 방어 시책 등을 아우르는 조선-일본 간 통교 관계를 ‘태종 7년 통교 체제’라 칭하였다.<br/> ‘태종 7년 통교 체제’를 시행한 결과, 1409년(태종9)부터 남쪽 변경에서 왜구활동은 거의 소멸 상태로 들어갔다. 이렇게 남쪽 변경이 안정된 후, 조선 조정은 북쪽 변경에서 여진족에 대한 적극적인 군사 조치로 나설 수 있었다. 1410년(태종10) 3월 최초의 여진 정벌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고, 1411년(태종11)부터는 북쪽 변경에서도 여진족의 군사적 위협에서 벗어난다. 이렇게 조선의 남북 변경이 모두 평온한 상태는, 태종 7년 통교 체제를 이해하고 받아들였던 대마도주 소 사다시게가 사망하는 1418년(태종18)까지 유지되었다.
Authors
- Jong-Ho Song
Publication Details
- Journal
- The Korea-Japan Historical Review
- Published
- 2025-08-31
- DOI
- https://doi.org/10.18496/kjhr.2025.8.89.71
- Primary Topic
- Japanese History and Culture
- Type
- article
- Field-Weighted Citation Imp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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