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ckground of the Creation of Uiwoodo by Jo Chan-han and Its Development Process Later
이 글은 1630년에 선산에서 조찬한(趙纘韓)이 <의우도(義牛圖)>를 제작한 배경과 그 이후 의우 담론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살펴본 것이다.1630년 선산군 문수점에 살고 있던 김기년이 부리던 소가 호랑이의 위협으로부터 주인을 구했으며, 주인이 호랑이에게 물린 상처로 20일 후 죽게 되자 소도 따라 죽었다는 일이 알려졌다. 이에 당시 선산 부사였던 조찬한은 주인의 무덤 옆에 소를 묻어주고 의우총(義牛塚)이라 하고, 화공에게 명령하여 <의우도>를 그리게 하였으며, 자신은 <의우전(義牛傳)>을 지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 의우(義牛) 이야기는 쾌산원우(快山冤牛) 고사의 변형으로 보이기 때문에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렵다. 따라서 <의우도>를 제작하게 된 숨은 배경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이 일을 주도한 것은 선산의 유력 인물이었던 최현(崔晛)이고 조찬한은 그것을 실행한 인물이며, 이들이 이 일을 벌이게 된 것은 정치적 곤경을 타개하기 위한 충성 고백의 일환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이후 의우와 관련된 각종 시문들이 이어지게 되는데 이것은 크게 둘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1658년 이전에 창작된 것들은 선산 밖에 거주하는 사람이 우연히 선산을 지나다가 의우총을 발견하고 여기에 감동을 느껴 지은 부(賦)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반면 1658년 이후에 지은 시문들은 이복(李馥)의 주도하에 창작된 것들이다. 1658년 안동 교수로 부임하게 된 이복은 안동의 유력 인물이었던 김응조(金應祖)를 찾아가 시문을 부탁하여 받은 뒤, 홍여하(洪汝河)와 배유화(裵幼華)로부터도 차례로 시문을 받았다. 이복이 이들에게 시문을 부탁한 이유는 1630년에 제작된 <의우도> 뒤에 이들 시문을 붙이고 마지막에 자신의 시로 마무리하는 『의우도첩(義牛圖帖)』을 만들어 백성 교화에 활용하기 위해서였다.한편 1703년에 조찬한의 손자 조귀상(趙龜祥)은 향랑(香娘) 사건을 계기로 <열녀도(烈女圖)>를 만든 뒤 이를 1630년의 <의우도>와 통합하여 『의열도(義烈圖)』를 제작하였다. 여기에는 ‘의(義)’와 ‘열(烈)’을 강조하려는 일반적 의미 외에 자신의 조부인 조찬한의 의로운 행적을 드러내고, 정유재란 때 순절한 조모 유씨-조찬한의 부인-의 정려(旌閭)를 관철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판단된다.
Authors
- Sangwon Lee (ORCID: https://orcid.org/0000-0001-6960-5487)
Publication Details
- Journal
- Humanities Research
- Published
- 2025-02-28
- DOI
- https://doi.org/10.52743/hr.69.3
- Primary Topic
- Education and Work Dynamics
- Type
- article
- Field-Weighted Citation Imp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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