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oclamation Method and The Implications of the Will to Control the People in Late-Silla Period’s 「King Heungdeok’s Royal Edict」
「興德王 敎書」의 규제 대상은 眞骨 일반과 頭品에 국한되지 않았다. 「흥덕왕 교서」는 平人·百姓 및 村主에 대한 조문을 포함하였던바, 이 시기 신라 조정은 사치 금령을 고안하는 데 民 일반과 지방사회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들은 신라 국가의 사회 말단을 이루는 존재이자, 羅末麗初 사회 변동의 주체였다.<br/> 신라 하대 「흥덕왕 교서」의 公布는 적어도 두 단계를 거쳤다. 전자가 흥덕왕9년(834)의 최초 반포라면, 후자는 그것이 格으로 法典化되었을 때이다. 일단 「흥덕왕 교서」는 신라가 멸망하는 순간까지 신라의 법제로서 기능하였다고 보아야 한다.<br/> 「흥덕왕 교서」의 하달 및 公示 과정은 중국식 문서행정의 공유라는 측면에서 주변국의 사례를 참고해 재구성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흥덕왕 교서」를 비롯한 하대의 사치 금령은 하행문서 符式의 형태로 민간에 하달·공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흥덕왕 교서」의 公示는 榜文의 형태를 취했을 텐데, 사회 말단의 현장에서는 口頭를 통한 내용 전달도 함께 이루어 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村主는 官과 民의 중간 고리 역할을 수행하였다.<br/>「흥덕왕 교서」의 반포 취지는 “백성들이 사치와 호화로움을 다투고 있다”고 하여, 사치 현상의 원인을 ‘民’으로부터 구했다. 비록 「흥덕왕 교서」 반포의 가장 큰 요인은 ‘왕실’과 동등하게 사치품을 향유하던 진골 일반에 대한 규제라 여겨지지만, 교서의 조문에 규제의 대상으로 평인 ·백성이 명시되었음을 고려한다면 이를 단지 상투적 표현으로만 치부하기도 어렵다. 가령 이 시기 民의 구성원에는 다수의 商人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여겨지는데, 결국 취지의 내용은 民 내부의 경제적 분화까지 감안하여 음미될 필요가 있다. 富의 증대는 반드시 신분과 일치하지 않으므로, ‘왕실’의 입장에서 ‘사치의 만연’은 신분제의 정점에 위치한 그들 자신을 위협하는 적대적 행위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사치는 분에 넘치는 소비로서 기본적으로 分限을 어그러뜨리는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當代의 시세가 신라 ‘왕실’에게는 ‘사치의 만연’이자 ‘타락의 징조’로 읽혀졌을지라도, 거시적 측면에서 9세기 신라는 ‘富를 독점하는 시대’에서 ‘富를 경쟁하는 시대’로 이행하고 있었다. 나말려초 새로운 사회 주체로서 ‘호족’의 출현은 이러한 분위기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흥덕왕 교서」 속 民의 존재는 바로 그러한 흐름 속에서 음미될 필요가 있다.
Authors
- Taejin Ko
Publication Details
- Journal
- Wooden Documents and Inscriptions Studies
- Published
- 2025-06-30
- DOI
- https://doi.org/10.35302/wdis.2025.06.34.129
- Primary Topic
- Cultural and Historical Studies
- Type
- article
- Field-Weighted Citation Imp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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