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itual relationship between Joseon and Ming surrounding ‘a Royal edict’ and change of national sacrificial rites

1369년(공민왕 18) 고려가 원의 지배를 배제하고 명과의 새 국제관계를 모색할 때 당시 명 사신단의 일원인 서사호는 양릉정 옆에 비석을 세웠다. 그 내용은 고려가 명에 굴복하여 명의 영역이 되었으니 산천에 제사한다는 것이었다. 고려는 명의 조처에 반발했지만 반박할 여지가 없었는데, 조선 건국 후 태종이 악해독을 중사에 포함하면서 4악, 3해, 6독(『국조오례의』에는 7독)으로 명의 5악, 5진, 4해, 4독과 달리 구성하였고, 산천·성황은 소사로 취급하면서 국가의 호국 의식과 변경 의식을 강화하였다.<br/> 조명 관계를 보이는 의식은 ‘영조서의(迎詔書儀)’와 ‘연조정사의(宴朝廷使儀)’가 대표적이다. ‘영조서의’는 고려의 ‘영대명조사의’를 바꾼 것인데, 『고려사』와 다른 점은 국왕의 대가가 출궁·환궁하는 과정이 설정되어 있고, 고려의 국왕을 ‘왕’이라 칭했지만 조선에서는 ‘전하’라고 칭하며, 소차(小次)를 따로 왕을 위해 설정하고, 고려의 왕이 ‘홀’을 든 반면 조선에서는 ‘규’를 쓰는 등 양자 간 차이점이 적지 않았다. 의례적으로 고려에서 국궁(鞠躬) 시점이 삼무도(三舞蹈)를 시행할 때 뿐이지만 조선에서는 영조례 시행시, 사자가 제(制)가 있다고 말한 뒤, 조서를 용정에 넣을 때, 조서의 내용을 다 읽고 난 뒤, 삼무도를 행하기 전 등 5차례에 걸쳐 시행하였다. 결국 ‘영조서의’에서는 명의 황제를 높이고 아울러 조선 국왕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다음의 ‘연조정사의’는 사신들을 위로한 의식으로, 조선에서는 국왕과 왕세자, 종친의 3부류로 구분해 다례와 주례로 시행했는데, 국왕은 사신단에 술을 주고받는 빈주례(賓主禮)를 시행하지만 왕세자, 종친 등에는 왕이 술을 받지만 이들에게는 술을 내리지 않았다.<br/> 이러한 의례에서 황제(왕)에게 기존처럼 두 번 절하지 않고 ‘사배(四拜)’를 시행하였다. 명대 이전 황제에게 절을 두 번 했는데, 명의 조서에는 이를 네 번으로 바꾼 것이다. 사배는 주원장이 명을 세우면서 시행한 것으로, 당대에 만든 『명집례』에 규정되어 있지만, 환구, 종묘 등의 길례에서는 재배로 설정되어 있다가 1374년(명 태조 7)에야 사배로 바뀌었다. 고려에서는 사배를 대명의례에서만 사용하였지만 조선 태종대부터 이를 적극 수용하여 왕에게 사배를 시행하도록 명했고 이를 길례에서도 적용하였다. 따라서 『세종실록』 오례에서는 길례의 일부에서 재배를 시행한 기록이 있지만 『국조오례의』에서는 전부 사배로 바뀌었다.

Authors

Publication Details

Journal
Sahak Yonku The Review of Korean History
Published
2025-06-30
DOI
https://doi.org/10.31218/trkh.2025.6.158.7
Primary Topic
Cultural and Historical Studies
Type
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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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itual relationship between Joseon and Ming surrounding ‘a Royal edict’ and change of national sacrificial rites

Hyung Ju Han
Sahak Yonku The Review of Korean History
Cultural and Historical Studies
article

The ritual relationship between Joseon and Ming surrounding ‘a Royal edict’ and change of national sacrificial rites

Hyung Ju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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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1369년(공민왕 18) 고려가 원의 지배를 배제하고 명과의 새 국제관계를 모색할 때 당시 명 사신단의 일원인 서사호는 양릉정 옆에 비석을 세웠다. 그 내용은 고려가 명에 굴복하여 명의 영역이 되었으니 산천에 제사한다는 것이었다. 고려는 명의 조처에 반발했지만 반박할 여지가 없었는데, 조선 건국 후 태종이 악해독을 중사에 포함하면서 4악, 3해, 6독(『국조오례의』에는 7독)으로 명의 5악, 5진, 4해, 4독과 달리 구성하였고, 산천·성황은 소사로 취급하면서 국가의 호국 의식과 변경 의식을 강화하였다.<br/> 조명 관계를 보이는 의식은 ‘영조서의(迎詔書儀)’와 ‘연조정사의(宴朝廷使儀)’가 대표적이다. ‘영조서의’는 고려의 ‘영대명조사의’를 바꾼 것인데, 『고려사』와 다른 점은 국왕의 대가가 출궁·환궁하는 과정이 설정되어 있고, 고려의 국왕을 ‘왕’이라 칭했지만 조선에서는 ‘전하’라고 칭하며, 소차(小次)를 따로 왕을 위해 설정하고, 고려의 왕이 ‘홀’을 든 반면 조선에서는 ‘규’를 쓰는 등 양자 간 차이점이 적지 않았다. 의례적으로 고려에서 국궁(鞠躬) 시점이 삼무도(三舞蹈)를 시행할 때 뿐이지만 조선에서는 영조례 시행시, 사자가 제(制)가 있다고 말한 뒤, 조서를 용정에 넣을 때, 조서의 내용을 다 읽고 난 뒤, 삼무도를 행하기 전 등 5차례에 걸쳐 시행하였다. 결국 ‘영조서의’에서는 명의 황제를 높이고 아울러 조선 국왕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다음의 ‘연조정사의’는 사신들을 위로한 의식으로, 조선에서는 국왕과 왕세자, 종친의 3부류로 구분해 다례와 주례로 시행했는데, 국왕은 사신단에 술을 주고받는 빈주례(賓主禮)를 시행하지만 왕세자, 종친 등에는 왕이 술을 받지만 이들에게는 술을 내리지 않았다.<br/> 이러한 의례에서 황제(왕)에게 기존처럼 두 번 절하지 않고 ‘사배(四拜)’를 시행하였다. 명대 이전 황제에게 절을 두 번 했는데, 명의 조서에는 이를 네 번으로 바꾼 것이다. 사배는 주원장이 명을 세우면서 시행한 것으로, 당대에 만든 『명집례』에 규정되어 있지만, 환구, 종묘 등의 길례에서는 재배로 설정되어 있다가 1374년(명 태조 7)에야 사배로 바뀌었다. 고려에서는 사배를 대명의례에서만 사용하였지만 조선 태종대부터 이를 적극 수용하여 왕에게 사배를 시행하도록 명했고 이를 길례에서도 적용하였다. 따라서 『세종실록』 오례에서는 길례의 일부에서 재배를 시행한 기록이 있지만 『국조오례의』에서는 전부 사배로 바뀌었다.

Sahak Yonku The Review of Korean HistoryVol.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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