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Yeongjo’s Perception of Southern Song History and Utilization of Commemorative Spaces - Focused on Waryongsa and Hwangjechong -
淑嬪崔氏의 소생이라는 출신의 한계를 지녔던 영조는 世弟 책봉과 代理聽政을 둘러싼 노ㆍ소론 간의 첨예한 정쟁에 휘말린 가운데 경종 시해의 혐의까지 받으며, 극도로 불안정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즉위하였다. 이로 인해 즉위 초부터 심각한 정통성 위기에 직면했고, 재위 기간 내내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고 정통성을 확립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데 전력했다. 그가 南宋 高宗을 주목하게 된 것 역시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영조는 고종에 대해 인재 등용의 실패, 主和派 중용, 對金 굴욕 외교 등 선대 조선 군주들이 공유했던 비판적 시각을 견지했다. 그러면서도 특히 父兄인 徽宗과 欽宗이 금에 포로로 잡혀 있음에도, 이들의 구출과 복수를 외면한 점을 ‘孝悌’의 부재로 규정하며 강력히 비판하였다. 이는 皇考 숙종과 皇兄 경종에 대한 효성과 우애를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정통성을 공고히 해야 했던 영조 본인의 특수한 정치적 상황이 투영된 해석이었다.영조의 고종 비판은 고종의 失政으로 희생된 이들에 대한 추모와 현창 사업으로 이어졌다. 영조는 臥龍祠에 배향된 岳武穆[岳飛]에게 수차례 致祭하고, 문집 『精忠錄』을 重刊했으며, 휘종ㆍ흠종의 능으로 알려진 皇帝塚에 대한 보존 조치를 명하였다. 나아가 황제총 인근에 사당을 세워 文天祥을 휘종ㆍ흠종의 配享功臣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신료들의 반대에 직면하자 대신 와룡사에 追配하고 그곳을 三忠祠로 명명했다.요컨대, 영조는 남송 고종에 대해 자신과 유사한 즉위 과정을 거쳤으나, 자신과 달리 부형에 대한 도리를 저버린 군주로 규정하고, 이를 비판함으로써 자신의 孝悌를 부각하며 차별화하고자 했다. 이러한 영조의 행보는 삼충사ㆍ황제총 등 상징적인 공간을 성역화하고 국가적 행사를 실행함으로써 왕권의 정당성을 공고히 하는 한편, 신민들에게 충효 이념을 고취하려는 다층적 의도가 내포된 정치 행위로 평가할 수 있다.
Authors
- W.J. Kim (ORCID: https://orcid.org/0000-0002-7661-7897)
Publication Details
- Journal
- THE CHOSON DYNASTY HISTORY ASSOCIATION
- Published
- 2025-06-30
- DOI
- https://doi.org/10.21568/cdha.2025.03.113.253
- Primary Topic
- Cultural and Historical Studies
- Type
- article
- Field-Weighted Citation Imp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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