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tone Pillow Period of Choonwon Kwangsoo Lee
1944년 3월부터 1948년 8월까지 이광수는 4년 반을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의 사릉에서 머물며 농사했다. 사릉지역은 서울에서 멀지 않은 가난한 농촌이었다. 광릉은 조선왕조 세조대왕의 왕릉이고, 사릉은 조선왕조 6대 단종 왕비 송씨의 왕릉이다.<br/> 1945년 8월 15일, 춘원은 사릉에서 해방을 맞았다. 대단히 기쁜 일이었지만, 그는 마음속의 고뇌도 컸다. 지난 수년간 강요로 일본에 협력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철학과 역사서를 읽으면서 조용히 지냈다. 그리고 돌베개를 베고 잤다. 이때 「돌베개」라는 수필집도 간행했다. 그래서 나는 이 시기를 춘원의 ‘돌베개시기’ 라고 부른다.<br/> 해방으로부터 1948년 한국 땅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까지 3간의 해방공간을 춘원은 사릉에서 머물렀다. 해방 1년 후, 춘원은 운허 스님의 초청을 받아 봉선사에 신설된 광동중학교의 교사로 취임했다. 그는 1946년 겨울 학기 동안 광동중학교의 교사로 근무하였다. 일과 후 자주 숲속을 거닐며, 염불하고 경전 읽으며 좌선하는 충실한 불제자이었다.<br/> 1947년 사릉에 돌아와 농사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잠자는 소의 한숨소리를 들으며 지난날의 삶을 반추했다. 독립운동가의 전기인 『도산 안창호』를 출간하고, 수필집 『돌베개』와 소설 『꿈』 등의 작품도 간행했다. 1948년에 출간된 수필집 『돌베개』는 춘원의 봉선사와 사릉의 농촌 생활을 쓴 것이었다. 이 저서들은 춘원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해도, 결국 그의 생애를 정리 상징하는 전기적 저술들이 되었다.<br/> 그는 소박하게 살면서 소와 함께 채소와 곡식을 생산했다. 혼자 숲속을 자주 걸었고, 고향의 유일한 친족인 운허 스님과도 자주 만났다. 이전에 춘원은 세상에 빛을 발하는 문인이었지만, 여기서는 빛을 잃거나 감추는 한 나그네일 뿐이었다.<br/> 이 3년의 해방공간에 그는 광릉의 봉선사와 사릉에서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자연과 벗하면서 조용히 살았다. 그는 자신의 고뇌를 극복하면서 미래를 새롭게 준비하며 의미 있는 작품들을 생산했다. 그러나 그는 1950년 한국전쟁 중, 북한에 납치되어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br/> 이 해방공간에서 춘원은 광릉의 봉선사와 숲속 길을 좋아했다. 소하나와 벗 하나와 농사하며 농부들과 물싸움도 했다. 조용한 전원적의 소박한 농촌에서 그의 “돌베개의 사상”이 형성되었다.<br/> 오늘날 그의 발자취는 오직 이 광릉의 봉선사와 광동 중. 고등학교 및 사릉의 집터에 다소 남아 있다. 봉선사 입구에 줄 서 있는 10 여기의 스님 비석들의 한 구석에 그의 비석도 서 있다. 한반도의 유일한 그의 비석이다. 생전처럼 8촌 동생 운허 스님 곁에 서 있다. 2012년 광동학교에는 교가비가 세워졌다. 이 학교의 교사로서 춘원은 교가를 작사했다. 그가 살던 집터에는 텅 빈 밭 가운데에 1992년 탄생 100주년에 세워진 문입협회의 기념표석이 설치되었다.
Authors
- Yong-Cheol Shin
Publication Details
- Journal
- Chunwon Research journal
- Published
- 2025-06-30
- DOI
- https://doi.org/10.31809/crj.2025.6.30.007
- Primary Topic
- Cultural and Historical Studies
- Type
- article
- Field-Weighted Citation Imp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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