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yang Park Clan’s Tomb Lawsuit and Protecting the Founder’s Tomb-Mountain during the Late 19th Century : The Role of Imsil County Governor Park Si-sun
조선후기 성리학에 근거한 문중의식 심화, 山林의 경제적 가치 증대 등 다양한 이유로 촉발된 山訟은 19세기 말까지 이어져 사회적 폐단으로 고착화되었다. 19세기 말 함양박씨가에서도 시조 朴善의 선산을 둘러싼 산송이 일어났는데, 이 과정은 임실군수 朴始淳의 『雲紱日記』와 고문서 등을 통해 자세히 알 수 있다. 조선 전기 함양박씨는 서울·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대표적인 사족층 중 하나였다. 함양박씨의 묘역은 주로 경상도와 경기도에 분포했는데, 함양박씨의 貫鄕인 함양 賜琴洞에는 유일하게 시조 박선의 묘소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후손들이 함양을 떠나 흩어져 사는 바람에 선산은 충분히 관리되지 못했고, 함양박씨는 해당 지역 재지사족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같은 함양박씨인 박시순이 인근 지역인 임실에 군수로 부임하게 되었다. 1895년 임실군수로 부임한 박시순은 임실에 거주하는 동종들과 만남을 가진 후 時享을 위해 함양 사금동을 방문했다가 偸塚이 선산을 점유하고 있는 상황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는 임실군수로 재직한 1895년 7월부터 1897년 5월까지 약 2년의 기간 동안 大宗會를 개최하여 宗論을 모으고 함양 선산을 정상화하기 위한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투장자인 함양 아전 金正完, 장교 韓圭贊 등과의 산송이 불리하게 진행되자 함양박씨가는 서울 법부에 정소했고, 박시순은 조정의 고위 관원들에게 간찰을 보내 협조를 요청했다. 이후 법부의 지시로 인해 산청군수가 사관으로서 파견되었으며, 박시순은 산청군수에게 술상을 올리거나 문안 인사를 하는 등 개인적으로 접촉했다. 또한 임실군수인 자신의 이름을 가장 선두에 내세운 단자를 올리며 정소했다. 결국 함양박씨가 측이 승소하여 투총이 파내졌으며, 선산을 재정비하는 한편 지속적인 수호를 위해 인근에 位土를 마련했다. 사금동 산송은 임실군수 박시순과 동종의 협력 덕분에 승소할 수 있었다. 특히 박시순이 자신의 직위를 적극 내세워 산송에 임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서울·경기 지역에서 활동한 先代의 官歷, 婚脈 등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Authors
- Eunjin Lee (ORCID: https://orcid.org/0000-0003-4085-9664)
Publication Details
- Journal
- JEONBUK SAHAK The Jeonbuk Historical Journal
- Published
- 2025-03-30
- DOI
- https://doi.org/10.28975/jha.2025.03.30.377
- Primary Topic
- Historical Studies and Socio-cultural Analysis
- Type
- article
- Field-Weighted Citation Imp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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