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fe of Choi Hyung-han and the Enshrinement at the Shrine
崔亨漢(?~1504)은 燕山君 때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문과에 급제한 뒤 중앙에서는 주로 사헌부에서 활동했고, 玉果와 靈光, 靈巖 등의 목민관으로 재직하면서 선정을 펼치며 문풍을 진작시키기 위해 애썼다. 이러한 그의 이력과 활동은 당시 사회 개혁 세력이었던 사림으로 구분할 수 있다. 중앙으로 진출한 사림은 언로를 장악해 국왕과 훈구세력을 견제하였고, 지방관으로 나가서는 유학적 가치관을 적용하는 한편 백성들의 교화에 힘썼다. 최형한이 관직 재직시 보였던 모습은 이러한 사림의 가치관과 활동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특히 甲子士禍(1504)가 발생하자 그 부당함을 극간하며 목숨을 끊었다.최형한은 옥과 현감으로 재직할 때 지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지역 사족들은 그 덕을 칭송하며 遺愛祠에 위패를 마련해 제향했다. 이후 옥과 현감의 이력이 있었던 金麟厚가 영귀사에 모셔지며 최형한은 제향인에서 탈락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유애사가 서원으로 탈바꿈하며 최형한의 고향이었던 광주의 사족들을 중심으로, 능주와 화순의 사족들의 지지가 더해지며 영귀서원의 사당에 최형한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성균관 유생의 지지까지 이끌어 내며 정조 때 성취를 이루었다. 하지만 이는 위차 문제를 낳았다. 본래 최형한이 김인후보다 앞선 세대 인물이었고, 관직도 더 높았기 때문에 좀 더 높은 자리에 위패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인후가 1796년(정조 20) 문묘에 배향되면서 위계에 변화가 발생했던 것이다. 이는 道統意識이 位次에 영향을 준 현상이기도 했다. 결국 결국 최형한과 김인후 중 누구의 위패를 좀 더 높은 쪽에 모시는지에 대해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최형한의 위패는 전라남도 광주 지산동의 경주최씨 선영 앞 芝山祠가 건립되자 옮겨졌다.
Authors
- Chong Ho Kim
Publication Details
- Journal
- Cheonggyeo History
- Published
- 2025-02-28
- DOI
- https://doi.org/10.33835/cghs.29.6
- Primary Topic
- Religious Studies and Spiritual Practices
- Type
- article
- Field-Weighted Citation Impact
- 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