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tatus and Existence of Ganseong(杆城) Geonbongsa Temple(乾鳳寺) in the Late Joseon Dynasty

본 논문은 조선후기 건봉사(乾鳳寺)의 위상과 존립 양상을 검토하여 당시 왕실 원당(願堂) 사찰의 운영 실태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조선전기까지 군현 단위 주요 사찰의 위상을 지녔던 건봉사는 17세기 후반 왕실의 원당 사찰로 지정되었다. 18세기부터 건봉사는 본격적으로 원당 사찰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19세기 이후에는 왕실과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졌다. 왕비와 상궁이 불사(佛事)를 주관하며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였고 고종(高宗)은 본인과 왕비 그리고 세자의 탄신(誕辰)을 축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건봉사는 두 차례의 큰 화재에 의한 피해를 국가의 지원으로 복구할 수 있었다. 왕실 원당 사찰이었던 건봉사는 화재라는 재난을 겪더라도 국가의 보호 속에서 사세(寺勢)를 유지할 수 있었다.<br/> 한편 17세기 후반 건봉사가 왕실 원당 사찰로 지정되면서 면세결(免稅結)이 지급되었다. 1707년 당시 건봉사는 약 4결의 면세결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후 건봉사의 면세결은 증가되어 1787년 약 6결의 면적을 소유하고 있었다. 왕실로부터 건봉사에 면세결이 지급되었던 것은 그곳에서 얻는 소출을 바탕으로 어의궁(於義宮)의 진상(進上) 재원을 확보하게 하기위한 것이었다. 또한 건봉사에는 지방 군현 수요의 잡역(雜役)이 면제되는 혜택이 주어졌다. 이것 역시 진상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게 하기 위한 장치였다. 그런데 1750년 균역법(均役法) 시행 이후 사찰의 감소로 잡역 면제 조치가 제대로 이행되지 못하였다. 실제 1880년 건봉사는 약 130여 항목의 잡역을 부담하고 있었다. 이때에도 왕실에서는 완문(完文) 발급을 요청하여 잡역의 면제를 지속적으로 보호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국가 및 왕실이 원당 사찰의 존립을 지원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br/> 이처럼 조선후기 왕실 원당 사찰로의 위상을 확보하였던 건봉사는 국가와 왕실의 보호 속에서 사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지점은 조선시대 사찰의 역사상이 다채로웠다는 점을 알려준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사찰을 쇠락의 측면으로만 바라보는 경직된 시각에서 벗어나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Authors

Publication Details

Journal
Sahak Yonku The Review of Korean History
Published
2024-12-31
DOI
https://doi.org/10.31218/trkh.2024.12.156.233
Primary Topic
Cultural and Historical Studies
Type
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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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atus and Existence of Ganseong(杆城) Geonbongsa Temple(乾鳳寺) in the Late Joseon Dynasty

Seon-Gi Kim
Sahak Yonku The Review of Korean History
Cultural and Historical Studies
article

The Status and Existence of Ganseong(杆城) Geonbongsa Temple(乾鳳寺) in the Late Joseon Dynasty

Seon-Gi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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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본 논문은 조선후기 건봉사(乾鳳寺)의 위상과 존립 양상을 검토하여 당시 왕실 원당(願堂) 사찰의 운영 실태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조선전기까지 군현 단위 주요 사찰의 위상을 지녔던 건봉사는 17세기 후반 왕실의 원당 사찰로 지정되었다. 18세기부터 건봉사는 본격적으로 원당 사찰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19세기 이후에는 왕실과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졌다. 왕비와 상궁이 불사(佛事)를 주관하며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였고 고종(高宗)은 본인과 왕비 그리고 세자의 탄신(誕辰)을 축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건봉사는 두 차례의 큰 화재에 의한 피해를 국가의 지원으로 복구할 수 있었다. 왕실 원당 사찰이었던 건봉사는 화재라는 재난을 겪더라도 국가의 보호 속에서 사세(寺勢)를 유지할 수 있었다.<br/> 한편 17세기 후반 건봉사가 왕실 원당 사찰로 지정되면서 면세결(免稅結)이 지급되었다. 1707년 당시 건봉사는 약 4결의 면세결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후 건봉사의 면세결은 증가되어 1787년 약 6결의 면적을 소유하고 있었다. 왕실로부터 건봉사에 면세결이 지급되었던 것은 그곳에서 얻는 소출을 바탕으로 어의궁(於義宮)의 진상(進上) 재원을 확보하게 하기위한 것이었다. 또한 건봉사에는 지방 군현 수요의 잡역(雜役)이 면제되는 혜택이 주어졌다. 이것 역시 진상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게 하기 위한 장치였다. 그런데 1750년 균역법(均役法) 시행 이후 사찰의 감소로 잡역 면제 조치가 제대로 이행되지 못하였다. 실제 1880년 건봉사는 약 130여 항목의 잡역을 부담하고 있었다. 이때에도 왕실에서는 완문(完文) 발급을 요청하여 잡역의 면제를 지속적으로 보호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국가 및 왕실이 원당 사찰의 존립을 지원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br/> 이처럼 조선후기 왕실 원당 사찰로의 위상을 확보하였던 건봉사는 국가와 왕실의 보호 속에서 사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지점은 조선시대 사찰의 역사상이 다채로웠다는 점을 알려준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사찰을 쇠락의 측면으로만 바라보는 경직된 시각에서 벗어나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Sahak Yonku The Review of Korean HistoryVol.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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