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ation of ‘Hwayangdong’ and its Political Spatialization in the Late Chosŏn Dynasty
이 글은 조선후기 尊周大義의 흐름 속에서 ‘華陽洞’의 조성 과정과 변곡점을 분석한 것이다. 당대 지식인들은 명 멸망 이후 붕괴된 중화질서를 관념적으로 유지하고자 하는 존주대의를 실천하기 위해 해당 가치와 연계된 인물을 현창하거나 이를 강조할 수 있는 공간과 장치를 만들었는데 이의 대표적인 곳이 ‘화양동’이다. 화양동은 1666년 송시열이 우거하기 시작한 이래로명 황제의 어필 봉안과 만동묘의 설치로 조선 후기 존주대의에 대한 권위를 상징하는 곳으로 점차 자리 잡았다. 또한 송시열을 獨享하는 華陽書院과 송시열계 道統을 시각화한 華陽九曲이 설정되어, 노론의 정치ㆍ사상적 권위를 표상하는 공간으로 인식됐다.한편, 명 멸망 1주갑인 1704년을 전후하여 국가와 송시열계 문인들은 大報壇과 萬東廟를 설립하여 존주대의를 현창하고 자 했다. 이 과정에서 경상도 상주에서 영남 남인 李萬敷와 노론成晩徵 간에 만동묘를 둘러싼 논쟁이 발생하였다. 이의 핵심은 만동묘의 非禮性과 黨論의 有無였다. 하지만 만동묘를 둘러싼 논란과 경종대 노론의 정치적 부침 속에서도 ‘화양동’은 1716년 이루어진 丙申處分으로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18세기에 접어들어 국왕이 각종 정치 의리를 판단하고 백성을 교화하는 이른바 ‘君師’로서 의 위상을 견지하고 탕평정국을 형성함에 따라 ‘화양동’은 점차 변화하기 시작한다. 영조대 초반 노ㆍ소론 사이에 균형을 추구하던 영조는 존주대의 강조의 흐름 속에서 ‘화양동’은 강조하되, 송시열의 위상 제고를 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1749년 대보단에 三皇을 합사하는 과정에서 명 황제에 대한 제사의 주도권을 국왕이 장악함과 동시에 국왕과 송시열 간의 위계를 설정하였다. ‘화양동’을 견제하였던 영조와 달리 정조는 ‘화양동’과 송시열이 지닌 이미지를 존주대의의 자장 속에서 적극 활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편, 정조는 『尊周彙編』의 「皇壇志」의 부록으로 「華陽洞志」를 수록하여 ‘화양동’이 국가가 인지하는 존주대의의 범주에 포섭되었음을 드러냄과 동시에 영조대 이루어진 국가와 ‘화양동’ 간의 위계를 재차 강조하였다.17∼18세기를 거쳐 확고한 정치ㆍ사상적 지위를 획득한 화양동은 19세기에도 그 위상을 견지하였다. 그러다 고종대 ‘화양동’은 이곳의 정치ㆍ사상적 지위를 형성하던 만동묘와 화양서원이 연이어 철폐됨에 따라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 후 만동묘가 국가 체제하에 복설됨에 따라 ‘화양동’은 다시금 존주대의를 상징하는 공간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화양동’은 이곳의 정치적 영향력을 상징하는 화양서원이 끝내 복설되지 않아, 존주대의의 상징적 공간으로서 위상만 남게 되었다.
Authors
- So-hee Park
Publication Details
- Journal
- THE CHOSON DYNASTY HISTORY ASSOCIATION
- Published
- 2024-12-31
- DOI
- https://doi.org/10.21568/cdha.2024.12.111.139
- Primary Topic
- Chinese history and philosophy
- Type
- article
- Field-Weighted Citation Imp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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