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appearance of Yulgok Yi-Yi and His Legacies around the Injo Restoration in 1623

이 연구는 인조반정 전후 정치·사상계의 율곡 이이(1536-1584)에 대한평가와 위상 변화에 대한 시대적 추이와 의의를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이는 대부분의 생애를 관료로 활동했지만, 해주 은병정사에서의 강학활동은 그의 문인집단이 형성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이이의 문인들은 첫째, 해주 및 해주 인근에서 은병정사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인물, 둘째, 외지에서 해주를 방문하여 이이에게 학문을 전수받은 인물, 셋째, 이이와 혈연관계로 연결되어 학문을 전수받은 인물 등으로 구분된다. 이들은 성리설 뿐만 아니라 이이의 정치론·경세론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며 공동의 학문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다.이이 사후 문인들은 성리설을 중심으로 이이의 학설을 비판적으로 학습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구축해갔다. 성리설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이이를 현창하기 위한 노력은 『율곡집』 간행과 서원 건립으로 이어졌다. 문집은 이이의 학문을 전승하는 수단으로서, 서원은 이이를 배향하고 학문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공간으로서 기능하며 점차 문인에서 학파로의 성장가능성을 열어주었다.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까지 이이는 조정에서 잊혀진 존재였다. 이이에 대한 평가는 왕안석 등과 비교되며 부정적인 것이 일반적이었다. 1636년 인조반정은 이이가 재현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이는 그의 문인이 포함된 서인(西人)이 정계의 주도권을 잡았던 데에 그 원인이 있었다. 『성학집요』, 『격몽요결』 등이 조정의 주도로 간행되었으며, 국정 현안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이이가 제안했던 경세론들이 반복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하였다. 이이 경세론이 언급된 것은 정치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17세기에 각종 현안들을 해결하는데 있어 시의 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인조반정이라는 정치적 사건에 따라 재현된 이이였지만, 문묘종사는 인조대에 걸쳐 시행되지 못하였다. 문묘종사는 학파의 종장을 넘어서 ‘선정(先正)’으로 공인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이 문묘종사의 실패는 그의 행적이나 정치활동, 그리고 성리설이 현 시점에서 조선사회 전체가 동의할 만큼의 위상을 획득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한계들은 향후 율곡학파에게 있어 이이와 관련한 다양한 과제들을 남기게 되었다.

Authors

Publication Details

Journal
The Study of Korean History of Thoughts
Published
2024-12-31
DOI
https://doi.org/10.31309/skht.78.202412.4
Primary Topic
Chinese history and philosophy
Type
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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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appearance of Yulgok Yi-Yi and His Legacies around the Injo Restoration in 1623

Kyung-dong Lee
The Study of Korean History of Thoughts
Chinese history and philosophy
article

The Reappearance of Yulgok Yi-Yi and His Legacies around the Injo Restoration in 1623

Kyung-dong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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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이 연구는 인조반정 전후 정치·사상계의 율곡 이이(1536-1584)에 대한평가와 위상 변화에 대한 시대적 추이와 의의를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이는 대부분의 생애를 관료로 활동했지만, 해주 은병정사에서의 강학활동은 그의 문인집단이 형성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이이의 문인들은 첫째, 해주 및 해주 인근에서 은병정사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인물, 둘째, 외지에서 해주를 방문하여 이이에게 학문을 전수받은 인물, 셋째, 이이와 혈연관계로 연결되어 학문을 전수받은 인물 등으로 구분된다. 이들은 성리설 뿐만 아니라 이이의 정치론·경세론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며 공동의 학문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다.이이 사후 문인들은 성리설을 중심으로 이이의 학설을 비판적으로 학습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구축해갔다. 성리설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이이를 현창하기 위한 노력은 『율곡집』 간행과 서원 건립으로 이어졌다. 문집은 이이의 학문을 전승하는 수단으로서, 서원은 이이를 배향하고 학문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공간으로서 기능하며 점차 문인에서 학파로의 성장가능성을 열어주었다.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까지 이이는 조정에서 잊혀진 존재였다. 이이에 대한 평가는 왕안석 등과 비교되며 부정적인 것이 일반적이었다. 1636년 인조반정은 이이가 재현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이는 그의 문인이 포함된 서인(西人)이 정계의 주도권을 잡았던 데에 그 원인이 있었다. 『성학집요』, 『격몽요결』 등이 조정의 주도로 간행되었으며, 국정 현안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이이가 제안했던 경세론들이 반복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하였다. 이이 경세론이 언급된 것은 정치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17세기에 각종 현안들을 해결하는데 있어 시의 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인조반정이라는 정치적 사건에 따라 재현된 이이였지만, 문묘종사는 인조대에 걸쳐 시행되지 못하였다. 문묘종사는 학파의 종장을 넘어서 ‘선정(先正)’으로 공인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이 문묘종사의 실패는 그의 행적이나 정치활동, 그리고 성리설이 현 시점에서 조선사회 전체가 동의할 만큼의 위상을 획득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한계들은 향후 율곡학파에게 있어 이이와 관련한 다양한 과제들을 남기게 되었다.

The Study of Korean History of ThoughtsVol.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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