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ation and Development of the Western Eumnak (⾢落) of Saroguk (斯盧國)
이 글은 사로국을 구성한 읍락 중 하나였던 서부 지구를 검토하는 데 목적이 있다. 본문에서는 서부 읍락이 기반한 지형, 교통로와 유적 분포를 공시적으로 살펴본 후, 목관묘/목곽묘 단계별로 서부 읍락이 변화해 나간 통시적 양상을 설명하였다.서기전 1세기 이래로 목관묘군이 먼저 확인된 곳은 사라리 지점과 화천리 · 모량리 지점이다. 사라리분묘군이 경주 분지로 들어오는 서쪽 영역 경계에 존재한다는 점과 화천리 · 모량리분묘군이 남부 읍락의 덕천리 지점과 연결되면서도 중앙분지로 진입하는 길목에 위치한다는 점이 교통적 이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주목되는 바는 서기전 1세기 대에 한해 서부 읍락의 사라리, 모량리와 남부 읍락의 덕천리가 토기 부장 의례에서 동질성을 지니는 상황이다. 모량리-덕천리로 통하는 길은 중앙분지를 거치지 않고도 두 읍락을 연결해주었으며, 한시적으로나마 다른 읍락에선 확인되지 않는 별도의 결속 양상이 인지된다고 하겠다.서기 1세기대의 자료는 사라리 130호묘라는 주수급 무덤이 대표한다. 또 다른 주수급 무덤인 양지리 1호묘와 함께 검토해 본 결과, 서북지방으로부터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유입 경로를 따라 지역 국의 통행 입구가 관문지 혹은 물류 집산지로 중시된 상황과 연관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두 주수급 무덤이 속한 지점은 대외 교역의 창구로 기능하면서 읍락 내부에서 유력한 위상을 가질 수 있었다고 추론된다.2세기 중~후엽에 이르면 서부 읍락 내에 중대한 재편 과정이 있었다고 상정되며, 사라리 일대는 이전에 누렸던 유력 취락의 위상이 확인되지 않는다. 그 대신에 늦어도 3세기 중엽 전후부터는 금척리 일대가 서부 읍락의 새로운 거점으로 부상한다고 보았다. 그 배경으로는 중앙분지에 들어선 국읍 중심지와의 물류 유통 차원에서 내부 결절지(교통상 중앙 지점)가 유리할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낙동강 하류 유역으로의 진출과 전략적으로 변경된 방어 경계선에 따라 중시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Authors
- kimyeong Jang
Publication Details
- Journal
- THE JOURNAL OF THE RESEARCH INSTITUTE FOR SILLA CULTURE
- Published
- 2024-12-31
- DOI
- https://doi.org/10.37280/jrisc.2024.12.65.59
- Primary Topic
- Marine and Coastal Research
- Type
- article
- Field-Weighted Citation Imp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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