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k Inho(朴寅浩) of Cheondoism and Boseong College in the 1920s
천도교 의암 손병희는 보성전문학교의 설립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널리 인식되어 있지만 그 뒤를 이은 춘암 박인호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보성전문학교의 명의상 교주(校主)는 박인호 였다. 박인호는 1893년 광화문복합상소 때 봉소로 참가했고, 동학농민혁명 때는 동학 농민 약 5만명을 통솔하여 충남 면천 승전곡에서 대승하였으나 일본군이 가세함에 따라 홍주성 전투에서 대패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의암의 독립운동을 도왔고, 손병희가 환원함에 따라 1922년 제4대 천도교 교주(敎主)로 취임했다. 1920년대 보성전문학교가 지향했던 사회적 공기(公器)로서의 ‘교육구국(敎育救國)’은 박인호의 ‘인맥 관계’와 ‘사회주의와의 공동전선’의 특징을 통해서 파악될 수 있다. 천도교 인맥으로는 박인호가 교장으로 임명했던 ‘윤익선’과 1922년 재단설립을 주도했던 고원훈, 보성전문학교 학생 박래형, 그리고 학교분규 시에 중재 역할을 했던 오상준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재단설립 이후 「사회학」과 「사회정책」교과의 새로운 편성, 잡지 『보성(普聲)』의 발간과 교수들의 성향, 그리고 졸업생의 진로를 살펴보면 보전의 ‘반제국주의적 교풍’을 가름할 수 있다. 또한 사회주의가 풍미함에 따라 조선공산당과 천도교 구파의 공동전선이 형성되었는데, 그 자장 안에서 활동했던 전기종, 이현상 등 보성전문학교 학생들의 주도적인 역할도 주목된다.
Authors
- Hye-Ran Jung
Publication Details
- Journal
- The History of Korean Education
- Published
- 2024-12-30
- DOI
- https://doi.org/10.15704/kjhe.46.4.202412.103
- Primary Topic
- Japanese History and Culture
- Type
- article
- Field-Weighted Citation Imp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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