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yal Patronage of Yongjusa Temple’s Buddhist Paintings in the 19th to early 20th Century
화성 용주사에 대한 연구는 正祖(1752-1800)가 顯隆園의 願堂으로 건립한 사찰의 창건시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바가 크다. 1800년 정조의 승하 이후 용주사에 대한 왕실의 후원은 정조 재위 시보다 축소되어 사찰은 정조 당대 만큼의 지위를 누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장헌세자의 殿牌를 봉안하고 재를 올리는 등 왕실 원당으로서의 기능은 이어지고 있었다.근래 용주사에 대한 연구는 왕실의 원당으로서 뿐 아니라 용주사에서 거행되었던 수륙재를 통해 심화되고 있다. 용주사의 前身이었던 葛陽寺는 수륙도량이 개설되어 고려 광종대 우리나라 최초의 수륙재가 거행되었던 곳이다. 조선 후기 갈양사터에 창건된 용주사는 1790년 9월 29일 성대한 奉佛式과 無遮大會가 개최되었다. 이 때 거행되었던 무차대회는 성격상 수륙재였다. 19세기에도 용주사에서는 수륙재를 비롯한 각종 야외의식이 개최되었다. 이 글에서는 19-20세기 전반에 조성된 용주사 불화 - 특히 야외의식용 불화를 중심으로 왕실 후원 양상과 야외의식에 대해 조명해보았다.1882년에 조성된 <오여래도>, <사보살도>, <팔금강도>는 용주사 수륙재에서 현괘된 도량장엄용 불화다. 영혼을 구제하는 오여래와 중생을 도와주는 사보살, 도량을 수호하는 팔금강은 18세기 이후 수륙재와 같은 야외의식에서 도량장엄의 불화로 기능한 것으로 보인다. 용주사가 소장한 16점의 불화는 기존 도량장엄 불화와는 乘物의 불·보살이 도상화되었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지닌다. 이 불화에 등장하는 상서롭고 독특한 동물들은 당시 궁중의 회화교본으로 추정되는 <백수도>에 묘사된 동물들과 유사하며, 이를 통해 도상적 영향관계를 추정할 수 있다. 또한, 불화의 바탕 재질로 수입산 면본이 사용된 점도 기존 불화와의 차이를 보여준다. 이러한 특징들은 용주사가 서울과 가까운 근기지역에 위치하고, 정조 이후에도 왕실의 지속적인 후원을 받았기에 가능했을 것이다.1933년에 제작된 <용주사 괘불도>는 일제강점기에도 야외의식에서 괘불을 현괘하며 의식을 거행했던 용주사의 전통을 보여준다. <용주사 괘불도>는 돌아가신 왕실 인사의 극락왕생과 왕가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제작되었으며, 왕실 원당으로서의 역할이 지속되었음을 시사한다. 괘불의 화기에는 100명이 넘는 상궁들이 발기 시주자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그들이 과거와 현재에 걸쳐 왕실 인사의 명복과 안녕을 기원했던 것을 보여준다. 특히 이들 상궁 중 일부는 20세기 야외의식에서 사용된 佛幡의 시주자로도 기록되어 있어, 이 시기 용주사 불사의 주요 후원자임을 알 수 있다.19-20세기 전반기 용주사의 야외의식용 불화는 정조 사후에도 지속된 왕실의 후원과 깊은 연관성을 보여준다. 이는 용주사가 다른 사찰과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시사한다.
Authors
- Kyung-Hee Ryu
Publication Details
- Journal
- The Art History Journal
- Published
- 2024-12-15
- DOI
- https://doi.org/10.24828/ahj.63.303.326
- Primary Topic
- Cultural and Historical Studies
- Type
- article
- Field-Weighted Citation Imp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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