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and Significance of Yongheungsa Temple in Changnyeong
용흥사는 창녕 비슬산 지역의 중요 사찰이었으나 현재는 없어졌다. 관 련된 문헌 기록으로는 조선후기 승려 벽암 각성의 문도인 동계 경일과 남 유용의 기문 등이 전하고 있다. 이 문헌에는 간략한 창건, 임진왜란 이후, 특히 숙종과 영조와 정조대의 중창 및 폐사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다. 용흥사는 신라의 고승 관기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그 후 고려시대의 용 흥사의 관련 사실은 1177년(명종 7) 승려 효초 등이 발원하여 향로를 주 조하였다. 고려말 승려 각료와 신도 곽항이 중창하여 요항사라고 하였던 것 같으나 조선초 억불시책을 거쳐 임진왜란시 폐사된 듯하다. 1614년(광해군 6)에 승려 지혜가 요항사터를 보고 개탄하여 20여 년 간 중창하여 용흥사와 6암자로 재창건하였다. 1631년(인조 9)부터 1651 년(효종 2)까지 승려 사경 등이 대웅전 등을 중수하였다. 숙종대 주지 종 혜와 엄공 등이 중창하여 낙동강 서쪽의 총림이 되었다. 발굴된 명문에 의하면 차명룡 부부는 1694년(숙종 20)에 용흥사에 시주하였으며, 그 무 렵 용흥사 건물의 재목이 1695년(숙종 21)에 연암서원을 짓는데 사용되기도 하였다. 1705년(숙종 31)에 창녕 출신 문인 윤우갑이 죽림재를 짓 고 살면서 용흥사에 와서 시를 남겼다. 이렇듯 용흥사는 『여지도서』나 『가람고』등에 새롭게 추가 기록되었 다. 그리고 18세기 「광여도」, 「해동지도」(1724년), 「지승」, 「동여도」, 「창녕군 읍지」 등에 기록이 보인다. 대구 동화사에서 1728년(영조 4) 「삼 장보살도」와 「지장시왕도」 조성시에 용흥사 화사 의균이 불사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에 의균이 창녕 용흥사 「아미타설법도」도 제작하였는 데, 이 불화의 “창령 용흥사 조경 극행 비구”라는 기문에서 용흥사 승려 조경과 극행 등이 참여하였다. 한편 용흥사의 표충사 제향 참사록에 의 하면 1749년(영조 25) 부터 1813년(순조 13)까지 10여 차례 참사하였다. 창녕 용흥사 승려 선일, 순행, 수한, 설허지연, 보관, 용파도주 등이 밀양 표충사 춘추 제향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영조 이후 정조 및 순조, 고종대의 지리류에도 용흥사가 찾아진다. 예컨 대 1799년(정조 23)에 편찬된 『범우고』 권1에서도 찾아진다. 의례집 춘 관통고에 의하면 1788년(정조 12)경 이후 성균관에 매년 흰 종이 50권을 바치도록 하였다. 승려 득림은 전답을 시주하였고 득찰과 도반으로 용흥 사 불사에도 참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826년(순조 26) 예조의 관문에 의거하여 영조의 서녀인 화령옹주의 방 원당으로 삼았다. 즉, 용흥사는 화령옹주의 원찰이었고 부속 암자로는 심적암, 은적암, 극락암, 각료암, 남암, 북암 등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 총독부 관보에 주지 임명에 관한 기록이 보이다가 폐사되었다.
Authors
- InGyu Hwang
Publication Details
- Journal
- The History Education Review
- Published
- 2024-11-30
- DOI
- https://doi.org/10.31968/hae.2024.11.39.199
- Primary Topic
- Ecology and Conservation Studies
- Type
- article
- Field-Weighted Citation Imp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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