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spatch of Tongsinsa and the role of Waekwan - Based on Kwansu-Maeikgi in 1719 -
본 연구는 기해사행(1719) 시기 왜관에서 작성된 관수매일기(館守毎日記)를 바탕으로, 통신사행이 이루어지는 동안 왜관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들여다보고자 한 것이다.<br/> 지금까지 한일교류사 연구에 큰 축을 이루어온 왜관과 통신사 관련 연구는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연구 성과를 축적해 왔으나, 이 둘의 접점에 관한 연구는 아직 존재치 않아 보인다. 이에 본고에서는 기해사행 시기 관수매일기를 바탕으로 이를 확인해 보고자 하였다.<br/> 사행을 준비할 때에는 관수는 영빙사(迎聘使)의 말을 따라 인원 배정이나 선박의 수배, 매와 말의 배송 등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나, 통신사의 교섭 대상은 영빙사이기 때문에 통신사와 직접 접촉하는 일은 없었다. 사행에 동행할 인원들이 좋은 날씨를 기다리며 고관(古館) 앞바다에서 대기하기에 왜관을 비롯한 쓰시마번(対馬藩)에서는 심각한 인력난을 겪었고, 이는 사행이 시작되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사행이 시작되고 나서는 양측의 서간과 일정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주로 맡았다.<br/> 기행사행의 경우에는 귀로 때에 사스나 관소(関所)를 들르지 않고 바로 부산으로 직행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런데 책임을 물을 대상인 삼사와 당상역관이 이에 대한 처리가 끝나기도 전에 한양으로 올라가 버리자 이 뒤처리는 온전하게 동래부사와 왜관이 도맡게 된다.<br/> 쓰시마번은 동래부사에게 계문을 올려 이런 일이 재차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답신을 보내게 요청하라고 재촉하나, 동래부사는 이미 조정에서 노고에 대한 치하도 끝났고 정사가 예조참판이 되었기에 계문을 올릴 수가 없다고 계속 거부한다.<br/> 쓰시마번주가 직서(直書)까지 보냈음에도 동래부사는 이를 계속 거절하였고 관수 또한 관수의 능력부족으로 비춰지기에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은 채 수개월이 흘러 버린다. 그러던 와중에 숙종이 병환으로 죽게 되자, 쓰시마번도 더이상 이를 끌 수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인지 관수에게 “동래부사가 ‘해당 사건에 관련하여 기록을 정확하게 잘 남기겠노라’ 약속하는 서간을 보내면, 이를 관수가 쓰시마번을 잘 설득해 보겠다고 말하라”고 지시를 내린다. 본 사건은 특별한 경우이긴 하나, 사행의 뒤처리가 결국 왜관과 동래부사 간의 문제로 발전되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Authors
- Jaehoon Lee (ORCID: https://orcid.org/0000-0003-0813-9878)
Publication Details
- Journal
- The Korea-Japan Historical Review
- Published
- 2024-08-31
- DOI
- https://doi.org/10.18496/kjhr.2024.8.85.267
- Primary Topic
- Financial Crisis of the 21st Century
- Type
- article
- Field-Weighted Citation Imp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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