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udy on the Popularity of the Guan Yu Worship in King Gojong"s Era and the Guan Yu Shrines(關羽廟) in Ganghwa
본 연구는 고종 연간 강화지역 관우묘의 창건 양상과 혼란한 시대 분위기 속에 관우묘의 역할이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고찰하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장군인 관우가 우리나라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소개된 것은 임진왜란기 명의 장수들에 의해서였다. 이후 관우는 왕실을 중심으로 무(武)와 충(忠)의 상징으로 활용되며 조선 사회에 안착하였다. 고종 연간에는 이전 시기와 달리 왕가의 복운을 빌기 위해 관우가 신앙되고 무녀의 개입 속에 관우묘가 창건되었고 관우가 왕(王)에서 제(帝)로 격상되는 등 보다 적극적으로 추앙되었다. 이 시기 관우신앙의 유행은 지방에까지 영향을 미쳐 전주, 하동, 개성 등지에도 관우묘가 건립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강화는 한 지역 내에 다수가 창건되었다는 점, 그리고 지금까지 모두 현존한다는 점에서 특별히 역사적 가치가 높다. 본 연구에서 살펴본 강화지역 관우묘의 창건과 운영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강화지역 관우묘는 남묘(1883), 동묘(1885), 북묘(1892)가 1km 이내 가까운 거리에 창건되었다. 이 중 남묘와 북묘는 창건자가 판관 오상준과 수문장 윤희보로 관리이며, 동묘는 마여사라는 민간인이 창건하였다. 그러나 동묘까지도 향사비는 매년 관에서 제공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br/> 강화지역에 단기간 내 다수의 관우묘가 창건된 이유는 19세기 말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 운요호 사건(1875) 등을 거치며 강화지역이 국방상 중요해지면서 많은 군사조직이 설치되고 여기에 근무하기 위해 무인들이 강화에 몰려든 것과 관련이 있다. 강화에는 이들을 위한 신앙의 장소가 필요했으며 이에 무신(武神)인 관우를 모시는 관우묘는 관(官)의 지원을 받아 창건되고 운영되었다. 또한 본 연구에서는 강화지역 관우묘의 창건이 조선 후기 최초의 도교 교단인 무상단(無相壇)과의 밀접한 교류 속에 이루어진 것을 확인하였다. 무상단의 단원들은 무인을 중심으로 한 중인계층이었다. 이들은 연행을 통한 넓은 식견과 인적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으며, 고종의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강화의 남묘와 북묘를 창건한 오상준과 윤희보는 무관이었으며, 오상준은 연행을 다녀온 적도 있었다. 특히 서난경은 무상단의 핵심 인물로 고종 연간 각종 도교서 출간에 관여한 인물로 남묘의 주련과 현판을 지었다.<br/> 이처럼 고종 연간 강화지역 관우묘는 왕실의 관우신앙 후원, 관(官)의 지원, 19세기 후반 결성된 도교 교단의 영향, 무인들의 필요 등 다양한 요인 속에서 창건되고 운영되었다. 그러나 관우신앙의 유행은 오래가지 못했다.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와 대한제국 군대해산이 발표되었고 1910년 국권피탈 이후 도교 단체들은 일제에 의해 이단화되어 흩어졌다. 지지세력을 잃으며 위기를 맞은 강화지역 관우묘는 지역에서 무속과 비운의 왕실을 위한 기도처를 자처하며 유지되었다. 현재 관우묘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혔고, 기존 관리인들이 고령으로 사망하여 보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본 논문은 연구의 불모지였던 지방의 관우묘, 특히 강화지역 관우묘를 소개하였다는데 의의가 있으며, 향후 관우묘 보존과 관련 연구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Authors
- Mi-Ran Shin (ORCID: https://orcid.org/0000-0001-8940-7867)
Publication Details
- Journal
- The Journal of Incheon Studies
- Published
- 2024-08-23
- DOI
- https://doi.org/10.46331/jis.2024.08.41.51
- Primary Topic
- Cultural and Historical Studies
- Type
- article
- Field-Weighted Citation Imp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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